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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에피소드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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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니 P였던 에피소드들

내 MBTI는 INTP이다. MBTI가 꽤 오래 유행하고 있어 간혹 질문을 받기에 대화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해 언젠가 테스트를 해보았었다. 결과인 INTP 4글자를 기억하고 있을 뿐, 그 내용에 대해서는 그다지 궁금하지 않아서 잘 모르고 있었다. E가 외향적이고 I가 내향적이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너 T야?'라는 유행어가 생겨서 T가 어떤 성향을 대표하는지도 알게 되었다(내용을 알고 나니 난 전형적인 T가 맞더라.) 그런데 오늘은 P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최근 처음 만난 아무개와의 대화 중에 '혹시 J세요?'라는 물음을 받았다. 그래서 'J가 뭔가요?' 하고 되물었다. 그제야 P의 반대 성향이 J인 걸 알았다. J가 계획적인 성향이고 P는 즉흥적이라 했다. 나는 내가 자신을 계획적인 편이라고 생각했기에 내가 P라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하지만 그 대화는 그다지 길게 이어지지 않아서 별 대수롭지 않게 흘려넘겼다.

불과 두어 시간 전의 일이다. 집 근처 도서관에서 공부하는데 창문 밖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신경이 쓰였다. 도서관이 문을 닫을 시간임을 알리는 방송에 짐을 챙겨 나와 집으로 걸어가는데 어디선가 아까 그 노랫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근처 호수공원에서 버스킹이라도 하는 것인가? 하며 잠시 감상이나 할 요량으로 노랫소리의 출처를 찾아 길을 틀었다. 그러나 근원지라 예상한 호수공원에 다다랐을 때는 노랫소리가 온데간데없이 흩어져 주변의 산책하는 사람들 소리뿐이었다. 이왕 집에서 조금 멀어진 김에 호수공원 근처에 있는 선술집에서 맥주나 한잔하고 들어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내 머릿속에 번뜩 든 생각

'아 이런 즉흥적인 결정들을 하니까 내가 P 성향이라는 소리인가?'

그러자 내가 남들에게 얘기하곤 했던 내 즉흥적인 결정에서 비롯되었던 에피소드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선술집에 가서 맥주 한잔하며 이 내용으로 글을 쓰면 되겠다는 그럴싸한 명분까지 얻은 나는 지난번에 자리가 없어서 방문해 보지 못한 작은 꼬칫집으로 당당히 온 것이다.

지금 나는 방금 찍은 이 사진 속 꼬치와 맥주를 곁에 두고 즉흥적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에피소드 1. 환생한 고라니와 영지버섯

고등학교 3학년 중간고사 둘째 날 아침이었다. 그날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역사 과목 시험이 있는 날이었다. 역사 과목 공부를 미루고 미루다 전날 밤이 되어서야 결연한 마음으로 시험 범위인 조선 후기까지 하룻밤 안에 독파하겠노라. 책상에 앉은 나였다. 그런데 귀신에 씐 듯 나는 잠이 들었고 책상에 엎드린 채로 밤을 새운 내 눈에 들어온 건 청동기 페이지가 펼쳐진 역사책이었다. 맙소사. 조선시대는커녕 석기시대 다음인 청동기 시대에서 잠이 들다니. 내 스스로가 너무 한심했다. 망연자실한 채로 정신이 나가 있는 내 속을 알 리 없는 어머니는 학교에 늦기 전에 어서 씻고 준비하라고 재촉하셨다. 홀린 듯 화장실로 가서 세면대에 물을 틀어놓고 다시 멍을 때리고 있었다. 세수하는 소리도 아니고 세면대에 물 넘치는 소리만 몇 분째 들리자 어머니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학교 안 갈 거니?'

나는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며 애꿎은 어머니에게 소리쳤다.

'안 가면 어때서요!'

어처구니가 없는 어머니는 네 맘대로 하라고, 일갈하시며 안방으로 들어가셨다. 나는 미련하고 대책 없었던 나 스스로에 대한 자책을 어머니로의 분노로 급히 변경하고 그까짓 학교 안 가고 만다라는 비겁한 결론을 내려버렸다. 그래서 책가방에서 교과서를 전부 꺼내고 사복을 한 벌 쑤셔 넣고 집을 나왔다(평일에 교복을 입고 동네를 돌아다니면 어른들 눈에 띌 것 같아 집 밖에 나가면 사복으로 갈아입어야 한다는 판단을 그 짧은 순간에 한 내가 대견하다.)

학교 방향 반대편으로 걷고 걸었다. 아무 생각 하지 않고 처음 가보는 길을 오전 내내 걸었다. 2시간쯤 걸었을까. 어느 어촌 마을에 다다랐다. 다리도 아프고 배가 고파 동네 슈퍼에서 다이제 초콜릿 과자와 2% 복숭아 맛 음료수를 사서 반쯤 마셨다. 그리고 잠시 고민했다. 지금이라도 학교로 가서 오후 시험을 칠 것인가. 아니면 그냥 오늘 하루 온전히 땡땡이를 칠 것인가. 주머니에 있던 100원짜리 동전을 손에 쥐었다. 던져서 앞이 나오면 학교로 돌아가고 뒤가 나오면 가던 길을 계속 가보자. 뒤가 나왔다. 그래서 더 걸었다.

다시 1시간 정도 흘렀을까. 작은 산등성이를 끼고 완만하게 돌아가는 해안도로 곁 인도를 걷고 있을 때였다. 해안도로 옆 산기슭 쪽에서 무슨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오는걸 알아챘다. 처음엔 무슨 소리인지 감이 안 왔는데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다시 소리가 날 때까지 들어보니 분명 어린 아이의 고함처럼 들렸다. 아니 이런 인적 드문 도롯가 옆 산속에서 왜 아이 소리가 들리는 걸까. 혹시 누군가 납치를 당해서 도와달라고 소리치고 있는 걸까. 3시간이 넘게 무료하게 걷고 또 걷던 내게 무언가 신기하고 조금은 위험할지도 모르는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긴장감이 들었다.

나는 다시 한번 그 소리가 들릴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길도 나지 않은 험한 산을 헤집고 올라갔다. 한참을 오르다가 멈춰서서 소리가 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그 소리의 근원을 찾아 방향을 수정해 가며 오르고 또 올랐다. 얼마나 올랐을까. 산 중턱쯤에 다다랐을 때 나무가 심겨 있지 않은 넓은 양지가 나왔다. 그리고 거기서 5미터쯤 앞에 서 있는 고라니 한 마리를 발견했다. 아. 이 소리의 근원이 저 고라니였구나. 내가 고라니 쪽으로 한 발짝 내딛자마자 고라니는 껑충 뛰어 오르더니 나무숲 사이로 달아나다 잠시 멈춰서서 나를 한참 쳐다보았다. 그리곤 깊은 숲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범죄의 현장을 목격한 것이 아니라는 안도감과 함께 고작 고라니 한 마리 보려고 여기까지 올라왔나 하는 허탈한 감정이 교차했다.

이제 다시 어떻게 산을 내려간담 하고 난처해하고 있다가 문득 내가 서 있던 양지를 둘러보고 흠칫 놀랐다. 내가 서 있던 자리와 고라니가 서 있던 자리가 쌍무덤 앞이었던 것이다. 야생풀이 너무 길게 자라 언뜻 보면 무덤인지 알지 못할뻔했으나 자세히 보니 분명 봉긋한 둔덕이 2개 나란히 있었다. 그때 나의 이야기꾼 기질이 발휘되었다. 이 무덤에 묻힌 두 명 중 한 명이 고라니로 환생을 한 것이구나!! 무덤이 모두에게 잊혀 이렇게 방치된 것이 안타까웠던 고라니가 누군가 여기에 무덤이 있음을 알아주길 바라며 그렇게 목청껏 울었던 것이 아닐까. 그래 내가 너의 소원을 들어주마. 이 두 무덤의 벌초를 해주리다.

낫도 없고 장갑도 없는 내가 무슨 수로 제대로 된 벌초를 할 수 있었겠냐마는 그냥 돌아가자니 찝찝해서 메리야스를 벗어 손에 두르고 맨손으로 무덤에 난 잡초를 뽑기 시작했다. 억센 풀들이어서 손이 베이기도 했지만, 자고로 이런 설화들에서 주인공은 은혜를 베풀어야 하지 않던가. 지금 생각해 보면 곧 있을 추석 전 벌초 철에 자손들이 정성스레 관리해 줄 무덤이었을 확률이 더 높지만, 당시의 내 머릿속에서는 찾는 이 없는 기구한 무덤이었다. 한참을 맨손으로 잡초를 정리하고 반쯤 남은 다이제 과자와 2% 음료수를 앞에 두고 절까지 드렸다. 그러고 쌍무덤 앞에 주저앉아 멀리 보이는 바닷가를 바라봤다. 자 고라니야 이제 이 은혜를 어찌 갚을 것이냐.

구전설화 속 이야기였다면 이때쯤 고라니가 나타나서 펑 하는 연기와 함께 여인으로 변해서 나한테 절이라도 했을지 모르지만, 현실은 고라니의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뭐 어떤가. 두고두고 친구들한테 풀 썰 하나가 만들어졌는데.

한동안 쉬다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산을 다시 내려가기 전에 그래도 미련이 남아 쌍무덤을 돌아보는 찰나. 내 발밑에 작은 영지버섯이 하나 보였다. 주말이면 아버지와 종종 산을 탔던 나이기에 영지버섯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너무 작아 아직 몇 년은 더 자라야 상품 가치가 있을 만한 것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자고로 은혜는 갚아야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것 아니겠는가. 이게 고라니가 내게 주는 선물로 생각하고 몇 년 뒤에 다시 와서 캐가리다 다짐했다(물론 다시 찾지 못했다.)

환생한 고라니와 영지버섯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간 내가 어머니에게 고라니 얘기를 할 수 있었겠는가. 현실로 돌아온 나는 어머니와 담임선생님에게 딱 적당할 만큼의 꾸지람과 뒷감당을 해야 했으나 그건 이 이야기의 핵심은 아니니 생략하겠다.

에피소드 2. 그 곳

지금, 이 순간도 그렇지만 나는 혼술을 즐겨 한다.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한 3년 전쯤의 일인듯하다. 지방으로 출장을 오게 되어 업무 관련된 사람들과 술을 곁들인 저녁 식사를 하고 헤어졌다. 왠지 술이 좀 모자란다고 느꼈던 나는 숙소로 가는 길에 맥주를 사서 혼자 마실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숙소로 가는 골목에서 무심코 옆을 바라보았는데 작은 샛길 깊숙한 곳에 동그랗고 흰 돌출간판 하나가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돌출간판엔 아주 심플하게 단 두 글자 '그곳'이라고 적혀있었다.

궁금함을 참지 못한 나는 그 샛길로 들어섰고 '그곳'이라는 돌출간판 아래 난 작은 문을 밀고 들어갔다. 문 뒤에는 좁고 긴 공간이 있었고 조용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아늑한 바(Bar)가 있었다. 손님 하나 없는 그 바에는 고급스러운 정장을 입은 나이가 지긋한 바텐더가 나를 반겼다. 이 무슨 영화와 같은 순간인가. 우연히 눈길을 둔 곳에 있던 골목 끝에 홀로 빛나던 간판. 그리고 손님 하나 없는 바를 홀로 지키는 나이 많은 노 바텐더. 나는 홀린 듯 바에 앉았다. '늘 마시던 걸로' 라는 게 영화 주인공의 클리세지만 나는 이곳에 처음 왔고 영화의 주인공도 아니었기에 어색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주절대기 시작했다.

'아 골목 안의 그곳이라는 이름이 혼자 빛나고 있어서 너무 궁금해서 들어오게 됐습니다'

60은 훌쩍 넘어 보이는 흰머리의 인자한 표정의 바텐더는 잠시 미소 짓더니 맥주 드릴까요? 라고 물었고 나는 네라고 답했다. 아주 작은 맥주병을 하나 내와 잔에 따라준 바텐더는 잠시 뜸을 들이고는 내게 물었다.

'처음 오신 거죠? 혹시 모르고 오셨나요?'

뭘 모르고 왔냐는 걸까? 회원제로 운영되는 곳이라기엔 너무 허름한 주택가 골목에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뭘 모르고 있는 걸까. 내가 질문의 의도를 언뜻 파악하지 못하고 대답을 얼버무리자, 바텐더는 익숙하다는 듯 비밀을 알려주었다.

'이렇게 그냥 지나다 모르고 들리신 분들이 종종 있거든요. 사실 이곳은 게이바입니다.'

아. 그렇구나. 난생처음 와보는 게이바를 이렇게 우연히 경험할 줄이야. 내가 게이가 아닌 건 연륜이 깊은 바텐더는 단박에 알았겠지만, 예의상인지 나의 성적지향을 확인한 뒤 가게의 자랑 아닌 자랑을 시작했다. 이곳이 아주 유명한 곳이라고(물론 게이들 사이에서….) 바텐더이자 주인장인 그 분의 말에 따르면 이 가게는 젊은 남자와 나이 많은 남자가 파트너를 찾기 위해 모이는 곳으로 유명하다 했다. 이반시티라는 동성애자들을 위한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소개되었던 지역 유명가게라고.

난 게이는 아니지만 이렇게 나이가 지긋하면서도 품격이 느껴지고 멋있는 어르신이 바텐더를 하는 곳을 발견한 게 너무 반가웠다. 자고로 바는 고된 하루를 마치고 가볍게 한잔하며 바텐더와 삶을 이야기하는 곳인데 그렇다면 연륜이 많은 노년의 바텐더보다 더 나은 말동무가 어디 있으랴. 마침 다른 손님도 없으니, 나에게는 너무나 안성맞춤인 가게였다.

그러나 그런 나의 평화는 얼마 안 가 깨어졌다. 그곳의 단골인 듯한 손님 한 명이 만취한 채로 가게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 손님이 만취한 것이야 거동을 보고 알았지만, 단골인 걸 눈치챈 건 손님을 보고 살짝 미간을 찌푸린 바텐더의 표정을 읽었기 때문이다. 바텐더는 그 손님에게 미리 내가 '이반'이 아님을 언질 주었다(그날 안 사실이지만 이반은 동성애자를 일컫는 단어로 '일반'인의 반대말로 쓴다고 했다.)

첫인상으로 파악한 것이라 단언할 순 없지만 그는 여장남자였다. 치마를 입었고 머리가 길었지만, 성대가 도드라졌고 목소리가 두꺼웠다. 아마도 관련된 업종에 종사하는 성 노동자가 아닐지 싶었다. 일을 마치고 이 바에 와서 바텐더에게 이런저런 손님 흉을 보며 하루를 마감해 왔을 것 같았다. 그런데 뉴페이스의 일반인인 내가 떡하니 맥주를 마시고 있네. 괜히 장난기도 동했을 것이고 술에 취한 김에 손님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나에게 풀고 싶었던 것일까. 바텐더가 미리 걱정해서 언질을 줬건만 그(또는 그녀)는 나에게 자꾸 치근덕댔다.

그러나 적당히 술주정을 받아주고 대꾸해 주자 다행히도 금세 누그러진 그는 바텐더의 눈치 살을 못 이긴 척 인사하고 가게를 떠났다. 그 이후로 나는 바텐더와 둘이 참으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한편으로는 이런 바텐더를 게이바가 아니면 만나기 힘들다는 사실이 아쉽기도 했다. 그날 나는 다음에 꼭 다시 들리겠다고 다짐하고 그곳을 나왔다.

그러나 그 이후로 아직 다시 방문해 보질 못했다. 이 글을 쓰며 기억난 김에 조만간 다시 가봐야겠다.

일단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 지어야겠다. 술집이 이제 문을 닫는단다. 내 취기도 적당히 올라 더 이상 글을 쓰기가 귀찮아졌다.

이렇게 오늘도 즉흥적인 P의 하루가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