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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마지막에 쓰는 글

아버지는 어떤 글을 남기고 싶으셨던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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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서 눈빛으로 무어라 말씀하셨다. 내가 언뜻 알아차리지 못하자 손가락 하나를 허공에 들고 휘저으셨다. 아 글을 쓰시겠다는 거구나.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마땅한 종이가 보이지 않았다. 회사 가방을 뒤졌더니 언제 넣었는지 모를 고지서가 하나 나왔다. 잘 펴서 책에 받힌 뒤 아버지의 손에 펜을 쥐여 드렸다.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서 한참을 써 내려가셨다. 이윽고 받아 든 종이를 본 나는 가슴이 저렸다. 단 한 글자도 알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해군 부사관이셨다. 내 기억에 아버지는 잠수함을 오래 타셨다. 출동이 잦았고 한 번 출동을 나가면 3개월 동안 집에 오지 못하셨다. 젊은 어머니는 나와 남동생을 혼자 키우다시피 하셨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복귀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셨다. 오랜만에 집에 온 아버지는 매번 어머니의 손에 손바닥만한 공책을 쥐여주셨다. 한참이 지난 후 그것이 어머니에게 쓴 편지란 걸 알게 됐다. 태평양 바다 어느 깊은 곳에서 일과를 마친 아버지는 하루하루 일기 형식의 편지를 써오셨다. 어떤 날엔 공책의 여백에 작고 예쁜 꽃이나 열대어 같은 그림도 그려져 있었다.

5년전 결혼기념일 편지에 쓰였던 당신의 애칭이기도 했던 코스모스, 내가 좋아하던 꽃중에 하나이기에 당신을 생각하며 그려보았오 잠수함이라는 좁은 공간속 생활에서 내가 이런 감상적인 생각속에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다는 것이 놀라울 일이요 건강하시오 -남편-

내가 5학년이 되면서 국민학교는 초등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육상 근무를 시작하셨다. 자주 집을 비우셨던 아버지가 매일 저녁 퇴근해 집에 계신 모습은 낯설었다. 그보다 낯선 광경은 매일 밤 아버지가 내 방 컴퓨터 앞에 앉아 계셨던 것이다. 그 무렵 아버지는 부사관 학교의 교육도 담당하셨다. 그래서 교육자료를 만들고 계신 줄로만 알았다. 내가 중학생이 된 해의 어느 날 아버지는 우리 앞에 한 권의 책을 내미셨다. 아버지께서 직접 만드신 수필 모음집이었다. 모두가 잠든 깜깜한 밤 모니터 불빛만 아른거리는 내방에서 독수리 타법으로 수필을 써오셨던 것이었다. 비록 정식으로 출판한 것은 아니었지만 말끔하게 제본된 책이었다. 총 3권을 만들어오셨는데 먼 훗날 나와 동생이 출가하면 한 권씩 주시겠노라 하셨다. 그리고 아버지는 2001년, 2007년에도 수필집을 하나씩 더 묶으셨다. 그렇게 총 3부로 완성된 아버지의 수필집은 출가와 함께 나의 손에 건네졌다(이유는 모르겠으나 마지막 3부는 표지가 없다.)

언젠가는 이 여름의 매미들처럼 훌쩍 부모곁을 떠나 자신들의 또다른 삶을 영위해 나갈 그날까지 사랑하는 아이들의 버팀목의 아빠로써 힘겨울지 모를 삶의 더위를 슬기롭게 이어나가길 기원해본다.

- 가정수필모음2집 '매미' 중에서

나와 아내는 주례가 없는 결혼식을 올렸다. 주례를 부탁드릴 만한 은사님이 없었거니와 예식장에서 형식적으로 불러주는 주례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대신 직접 쓴 혼인서약서를 하객들 앞에서 낭독했다. 그리고 미리 아버지께 덕담을 해주십사 부탁을 드렸고 아버지는 흔쾌히 수락하셨다. 단상에 오르신 아버지는 품에서 편지 봉투를 하나 꺼내셨다. 덕담을 부탁받았으나 덕담은 내년 설에 정식으로 세배받고 나서 하는 것으로 미뤄두기로 하고 오늘은 두 사람의 앞날에 축하의 말을 전하겠다는 유머로 말문을 여셨다.

일상의 많은 것들이 네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더라도 좌절하거나 분노하지 않는 좀 더 슬기로운 젊은이가 되기를 소원한다.

- 결혼식 축사 중에서

편지지 두 장에 걸친 나와 아내를 향한 아버지의 진심 어린 당부와 축하의 말은 우리를 비롯해 많은 하객의 가슴 속에 남았으리라. 그러나 정식으로 세배받고 덕담하겠다던 아버지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우리가 결혼했던 그해 초겨울 아버지는 폐암 4기 판정을 받으셨다. 군 생활을 하며 평생 피워온 담배가 원인이었다. 수술이 불가하여 항암치료만 할 수 있는 상태였다. 높지 않은 완치율이라지만 아버지는 긍정적이고 의지가 강한 분이었다. 치료에 적극적이었고 완치의 희망을 놓지 않으셨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아버지는 쇠약해지셨다. 그해 겨울이 지나고 꽃이 생명력을 틔우는 봄이 왔다. 나와 어머니는 보호자 신분으로 담당의와 면담했다. 앞으로 6개월을 넘기기 힘들 것이라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그 말을 전하지 말자 하셨고 나는 동의했다. 그러나 나는 그때의 결정을 후회한다. 만약 아버지가 자신에게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걸 아셨다면 더 많은 이야기와 글을 남기지 않으셨을까.

아버지가 겪는 고통의 강도는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금새 인간의 의지로 버틸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고 마약성 진통제에 의존하게 되었다.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잠들어 계셨고 가끔 깨어있으실때 조차 고요했다. 2013년 7월의 어느 날. 아버지는 내게 건네받은 고지서 뒷면에 알아볼 수 없는 글씨를 정성스레 쓰셨던 것이다. 그로부터 열흘 뒤 아버지는 생의 마지막 숨을 내뱉으셨다.

십여 년이 지난 이제서야 생각해 본다. 아버지는 생의 마지막에 무슨 글을 남기고 싶으셨던 걸까? 이제는 나도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내 아버지 인생의 깊이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그래도 감히 상상해 보련다. 아버지께서 마지막으로 남겨주신 그 글을.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이에게

여보 전역하면 강원도에 전원주택을 짓고 둘이서 행복하게 살자던 약속 못지켜서 미안하오. 사랑하오.

충의야 넌 항상 알아서 잘해왔으니 앞으로도 잘 하리라 믿는다. 사랑한다.

용의야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라. 더 많이 믿어주지 못해 미안했다. 그리고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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